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오빠가 돌아왔다_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오빠가 돌아왔다_김영하
  • 김효신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0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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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와 페티시즘은 어디에 있는가?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오빠가 돌아왔다>

-섹슈얼리티와 페티시즘은 어디에 있는가?

소설은 픽션이다. 철저하게 독자를 기만하여 작가의 생각 위에 현실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기에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와 상징들은 하위 모방에서 형이상학으로 해석되어 보임으로서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특히 소설은 다른 예술과는 다른 직접적인 표현방식보다는 작가의식의 흐름 속에서 감춰져 있기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있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오빠가 돌아왔다> 두 작품에서는 작가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 두 작품의 줄거리 상으로는 자살도우미와 가족이야기다. 그 안으로 좁혀 들어가면 전작은 자살도우미가 대상을 찾아 편안의 죽음을 도와주는 현실세계의 또 다른 사자(死者)를 자청한다. 남자와 그 남자에게 찾아오는 의뢰자 속의 여자들의 인물은 클림트의 작품 속 인물인 (유디트)를 닮은 냉소적인 이야기를 옴니버스로 펼쳐놓았고, 후작은 집안의 골칫덩어리 오빠가 못생긴 10대 어린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생기는 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로 이혼해서 따로 살고 있는 부모님과 못생긴 어린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 오빠를 둘러싼 가족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작품 속에 감추기와 드러내기는 바로 성()이다. 현대문학작품 속에서 성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은 널리고 널렸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상징도 무수하게 많다. 다분히 무수한 성에 대한 이야기 속에 이 두 작품을 집어넣는다면 흥미유발 정도의 작품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 그렇지만 좀 더 다른 시각의 성을 바라본다면 성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두 작품의 성은 섹슈얼리티와 페티시즘이다.

섹슈얼리티는 성행위에 대한 인간의 성적 욕망과 성적 행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제도와 규범들을 뜻한다. 즉 욕망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성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 사고, 감정, 가치관, 이해심, 환상, 성의 존재의미 등의 복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에 깔려있는 전반적인 성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복합성을 작가의 의도된 낚시질이라고 생각한다.

페티시즘은 성적 대상을 정상적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관련된 무생물로 대처하면서 성적 상징물에만 집착하며 인간관례를 대신한다. 예를 들면 교복, 속옷, 스타킹들로 직접적인 성행위보다는 자위에 강한 정신학적인 성 집착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이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잠재적으로 다른 사람의 용모, , 음성, 채취 등에 매료될 수 있기에 어느 한쪽으로 극한 둘 수 없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보여주는 섹스의 주요 중심행동 인물은 유디트를 닮은 그녀들이다. 첫 번째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유디트. 택시기사를 하는 동생과 아티스트인 형과 스스럼없는 성관계. 어머니의 장례 마지막 날 발인을 마치고 들어온 형 C의 눈에는 섹스를 하는 유디트와 함께 처음으로 집에 온 동생 K. 그리고 동생 K가 일하는 동안 형인 C와 함께한 섹스 후 여행은 눈 때문에 앞이 안 보일지경인 한계령을 함께 넘는 유디트. 결국 형제와 섹스를 공유하는 그녀의 입에는 항상 물고 있는 추파춥스와 북극곰의 상징들이 페티시즘의 보이고 있다.

또 한명의 홍콩에서 만난 유디트, 온 몸에 종이를 붙이고 하루 종일 바에 앉아 있는 마네킹을 하면서 돈을 번다. 여자의 몸에 달라붙은 종이는 부위에 따라 금액이 다른 종이들로 남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신체부위의 종이를 돈을 지불하고 떼어내며 대리만족을 얻는 직업으로 어느 날 돈 많은 남자가 찾아와 자신을 사 간 후로 집에서도 바에서와 같이 똑같은 마네킹 노릇을 하고, 남자가 자위한 정액을 먹으면서 살인한 유디트. 남자가 즐겨 마신 에비앙 병에 정액을 담아 마시게 한 부분 역시 물과 종이에서 페티시즘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유디트는 C와 작업을 하는 행위예술가 미미. 알몸 페인팅으로 행위예술을 하는 미미. 한 번도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지 않았던 그녀가 C와 작업을 하지만 결국 테잎을 모두 없애버리는 행동을 한다.

이 작품은 자살과 섹스의 두 가지의 열쇠로 답을 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문학동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문학동네.1996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보이는 페티시즘은 아버지와 오빠의 행동에서 보여진다. 아버지는 교복을, 오빠는 동생의 팬티를 훔쳐가는 행동이다. 갓 스물을 넘긴 오빠가 이 집안의 전부를 먹여 살리는 중요한 역할자로 묵인되는 행동이긴 하지만 동생(나)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변태적인 행동임은 분명하다. 아버지 역시 무직으로 오빠가 벌어 온 돈과 어디서나 떳떳한 민원제조공장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부로 맞질 않아 이혼한 어머니가 재결합을 하는 결정적인 역할 자는 새언니라는 못생긴 여자의 출현과 망나니 같은 오빠를 잡겠다는 면목으로 아버지와 어쩔 수 없는 동거이다. 가족이 생긴 이래로 처음으로 소풍을 떠나면서 집안의 행복을 만들어 가고 싶은 각자의 우문현답(愚問賢答)의 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문학동네
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문학동네.2010.

이 두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의 형태를 한쪽으로 몰아갈 수 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리얼리즘 안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잠재의식의 흐름의 찰나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영하의 그 밖의 장, 단편 작품들을 따져보면 섹슈얼리티보다는 리얼리즘의 현실적인 작품들이 더 강한 색을 보이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상징의 일부로 가져온 성()은 하나의 행위의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미학적 개념의 감정의 내면을 폭로할 수 있는 작가의 힘이자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자를 매료시킬 수 있는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광주N광주 jinrin7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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