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열사 30주기 추모행사위원회 출범
박승희 열사 30주기 추모행사위원회 출범
  • 김효숙 기자
  • 승인 2021.03.2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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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 열사 30주년 추모행사위원회 출범식 포스터 (제공=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광주N광주=김효숙 기자]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 1991년, 5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승희 열사의 30주기를 맞이하여 추모행사위원회가 꾸려진다.

박승희 열사 30주기 추모행사위원회는 오는 27일(토) 오후 4시, 전일빌딩245 다목적강당에서 출범식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행사는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기 위해 화상중계도 병행해서 진행된다.

추모행사위원회는 1991년 당시 박승희 열사 민주국민장 장례위원회 참여했던 이철우(당시 민주국민장 장례위원장, 현 5ㆍ18기념재단 이사장), 신경호(당시 민주국민장 호상, 전남대학교 전 학생처장) 등 광주전남지역사회의 원로들과 정성택(전남대학교 총장), 안영근(전남대학교 병원장)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자문위원으로 박봉주(광주전남 추모연대 공동대표)를 비롯한 광주전남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한다.

행사위의 상임위원장은 오창규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회장이 맡으며 공동행사위원장에는 열사의 고등학교 시절 은사인 고윤혁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목포지부장, 1991년 당시 박승희 열사 민주국민장 장례부위원장이었던 노훈오 전남대학교 전 총학생회장과 윤영덕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류봉식 광주진보연대 대표, 박재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대표, 최석호 광주전남대학민주동우회 상임대표, 박대수 전남대학교 민주동우회 운영위원장 등이 맡는다.

추모행사위원회는 4월 24일 (토) 정명여고의 박승희 열사 흉상 앞에서의 추모식을 시작으로 5월 19일 (수) 30주기 추모문화제를 비롯한 평전 발간, 다큐멘터리 제작, 온라인/오프라인 분향소 운영 등 다양한 추모 사업들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한 함께 30주기를 맞이하는 1991년 열사 추모단체들과 학술대회, 사진전, 토크콘서트 등을 준비하고 있다.

오창규 상임위원장은 “91년 오월은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쟁취한 절차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 내각제 개헌 추진 등 민중들의 요구를 왜곡하고 억압하던 노태우정권에 맞선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 항쟁이었다. 특히 광주지역에서는 잔혹한 국가폭력에 맞서 강경대의 운구행렬과 박승희의 도청노제를 사수해냈으며, 그 과정에서 80년 오월광주의 대동세상을 재현했던 역사이다. 이처럼 80년 오월의 정신과 91년 오월의 정신은 맞닿아 있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열사들이 바라봤던 시선 끝자락을 보며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승희 열사는 1987년 6월 항쟁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학생운동을 해왔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전교조 교사 해직반대 투쟁, 대학생 입학 후엔 교지편집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91년 4월, 시위 도중 전남대 한 학생이 직격 발사된 최루탄에 실명을 하게 되고 명지대 강경대는 백골단 쇠파이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박승희 열사는 여전히 국가폭력에 사람이 죽어감에도 취업걱정이 우선인 시대의 불감증을 슬퍼하다 전남대학교 5ㆍ18광장에서 열린 ‘고 강경대열사 추모 및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노태우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학우 단결하라!”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박승희의 분신항거는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는 민주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결과 노태우 정권의 내각제 개헌과 같은 반민주적 정책들은 폐기되었다. 또한 광주시민들은 광주진입 자체를 막아 나선 경찰병력과 사투 끝에 옛 전남도청 앞에서 강경대 열사의 노제를 무사히 치르고 망월동에 안장한 이른바 ‘운암대첩’이 있었으며, 박승희 열사의 장례식은 금남로에서 전남대 정문까지 행렬을 이루는 대규모의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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